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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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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윤 |
작성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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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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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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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세상은 결코 죽지 않는다 |
주자들의 세상은 결코 죽지 않는다. 유목민의 방랑벽이랄까? 유목민들은 생계 때문에 유랑을 선택하지만, 주자들은 생계 때문이 아니라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기호 때문에 길이나 자연 속을 달린다. 그런 달리는 세상은 행복처럼 내 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장난감처럼 내 주변에 있지도 않다.
성지 순례를 하는 신자들처럼 분명한 목적과 지표가 있거나 말거나, 만행하는 스님이나 신을 찾는 수도사들처럼 막연한 지표가 있든 없든 유사 이래 원시 인종이 이 세상에 나타난 이후 계속 우리를 매료시키거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두 발로 사냥감을 쫓아다녀야 했던 인간 최소의 상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은 서로가 서로의 주위를 도는 태양과 지구, 지구와 달처럼 서로가 서로를 맞서거나 보완하는데, 현대의 산업사회는 이동수단을 발에서 바퀴나 엔진으로 바꿔버렸다. 두 발로 길위나 길을 만들며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차량이나 비행기 속에 앉아 일을 따라 다니는 수동적 삶으로 바뀌었다.
사람이 달리던 길을 자동차가 달리게 되면서 사람들이 달리던 길이 자동차가 다니는 길로 변화되고 사람들은 변두리로, 빙 둘러 가도록 냉대받고 내쫓기거나 배척되어 좁고 불편한 길로 밀려나게 되었다. 요즘 자동차가 다니는 대개의 큰 길들은 우리 조상들이 말타거나 걸어 다니면 일상의 삶을 살거나 외적을 물리치던 길들이다.
최고로 도시화된 사회일수록 여가 활동을 위해 두 발로 이동하거나 떠나야 할 때는 더욱 맹렬히 달려들어야 한다. 동기는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여가에 대한 열렬한 추구는 필연적으로 조직적인 행태를 갖추게 만든다. 모르는 길을 가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놀람과 불안, 그리고 불신이다.
그래서 달리기에 대한 유혹은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유익하고 필연적인 일이 된다. 예기치 않았던 일상의 만남들을 과감하게 대면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아의 또 다른 이미지를 찾고, 친숙한 세계의 판에 박힌 습관을 부수고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달리다 보면 때로는 지치고 좌절하기도 하고, 힘들고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 결과 달리기 자체가 터무니없고 부질없다는 느낌이 들고 행복해야 할 삶의 장애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점점 더 도시의 인위적인 얼굴이나 관습적이고 판에 박힌 듯한 인간관계에서 실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부족감도 똑같은 현상이다.
사람들이 사회생활에서의 2% 부족감을 찾아 밖으로 난 길을 따라 헤매듯이, 주자들은 오늘처럼 햇빛 화창한 봄날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밖으로 나와 세상 속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달려가보는 것이다.
특별한 즐거움이나 특혜 받은 시간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삶의 새로운 해결책을 찾게 되리라고 기대한다.
이처럼 우리 시대의 달리기는 신석기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언자가 되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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