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라 초췌한 모습의 최모(40·회사원)씨. 열흘 전 그의 아내는 37세의 젊은 나이로 자궁경부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지난달 종영한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보며 눈물 짓던 그의 아내가 드라마 주인공 ‘맹순이’와 똑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잔인하다. 맹순이는 수술대에라도 올랐지만 최씨의 부인은 암이 신장에까지 전이돼 수술이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맹순이는 정밀검진 비용을 아끼느라 통증이 오는데도 병원을 찾지 않아 병을 키웠다. 하지만 최씨는 통증을 느끼는 아내를 방치한 것도 아닌데 피가 얼어붙는 말기암 선고를 받았다. 또 맹순이의 남편처럼 바람을 피우느라 아내를 소홀히 한 것도 아니다. 최씨는 인터뷰 내내 쉽게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최씨의 부인은 아직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실시하는 건강검진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다. 직장이 없고 40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궁경부암은 조기검진으로 일찍 발견되면 완치될 수도 있는데 그의 부인은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정작 검진이 필요했던 것은 아내였는데 아내는 5년전 아이를 출산할 때 이후 한번도 건강검진을 받지 못했습니다. 매년 검진을 받은 게 아내가 아니라 나였다는 게 미안하고 화가 납니다.”
3년째 암투병 중인 주부 박모(50·서울 부암동)씨도 암을 발견하던 2003년까지 건강검진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는 3년 전 오른쪽 가슴에 뭔가가 잡혀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병원을 찾지 않았다.
“당시 아들이 고3인데 내 몸은 문제가 아니었어요. 우선 아들부터 대학에 보내고 진단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박씨는 아들이 대학에 입학하기까지 6개월 동안 병든 자신의 몸을 외면했다고 털어놨다.
2003년 5월. 박씨는 유방암 3기며 3년 남았다는 말을 함께 들었다. 항암치료를 하면서도 그는 퉁퉁 부은 손으로 살림을 해야 했다. 오른쪽 가슴과 임파선을 잘라내 조금만 일을 해도 팔이 붓고 힘이 들지만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순 없었다. 그래도 그는 병에 걸린 게 남편이나 아이들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말했다.
전철규(43?서울 둔촌동)씨는 5년전 부인을 폐암으로 잃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 초등학생이던 아들은 이제 고등학생이 됐다. 하지만 전씨는 아직도 아이를 볼 때마다 아내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의 아내가 암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숨지기 한달 전. 이미 뇌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의사는 교통사고 당한 셈 치라고 했다.
“생의 마지막을 고통스럽게 보내는 아내를 지켜보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늦게 안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식구들만 돌보던 아내가 자격증도 따고 봉사활동도 다니며 활기차게 살려고 하던 때에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떠나버린 겁니다.”
지난 4월 오른쪽 가슴에서 뭔가가 만져져 병원을 찾았던 김은영(35?서울 중계동)씨는 요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느낌으로 살고 있다.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병명은 유방암. 김씨는 암이라는 말에 몇년 전 섬유종 진단을 받았던 게 생각났다. 흔한 것이고 심각하지 않다는 의사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만약 김씨가 직장에 다녀 정기검진을 받았더라면 유방암을 좀더 일찍 발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직장이 없고 만 40세가 넘지 않았기 때문에 검진 대상에조차 오르지 않았다. 김씨는 수술을 통해 암세포와 함께 가슴 일부를 도려내야 했다. 수술을 마치고 항암치료에 들어가자 머리카락이 전부 빠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4살,6살의 어린 아이들은 “엄마는 대머리”라며 웃어댔다. 직장을 다니며 2년에 1번 건강검진을 받던 그의 남편은 아내의 건강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인지 환자인 김씨보다 더 힘들어 했다. 김씨는 살아가면서 어느 때보다 힘겨운 6개월을 보냈다. 지난 10월을 끝으로 항암 치료는 마쳤지만 그는 죽음이 언제나 곁에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암 외에도 병을 뒤늦게 발견해 어려운 투병생활을 하는 전업주부들이 적지않다. 남성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당뇨병의 경우 병이 진전된 상태로 발견되면 심하게는 실명하며,다리를 궤양으로 절단하게 될 수 있다. 또 심장병의 경우 심근경색 협심증 등으로 갑자기 사망하기도 한다.
제 목 : [국민](1) 뒤늦은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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