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 성 일 : 2019.05.15 + 작 성 자 : 관리자
+ 제     목 : 43. 겉도는 만큼 경쟁력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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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겉도는 만큼 경쟁력은 떨어진다

고통은 어떤 교훈보다 강했고, 고통은 사람들의 가슴이 어떤지 이해하도록 가르쳐줬다. - 찰스 디킨스

< 이 글은 2019. 2. 7. 매일경제에 게재된 문병로 서울대 컴퓨터공학부 교수·옵투스자산운용 대표의 글 입니다.>

'고향의 봄'은 국민 동요지만 가사는 노인의 회고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 가사 어디에 어린이의 정서가 들어 있는가? 동요와 유일한 관계의 끈은 이원수 시인이 열네 살 때 지은 시라는 것이다.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와 살던 소년 이원수의 노래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어린이들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필자가 배운 동요 중에 아예 어른들이 지은 회고가가 한둘이 아니었다.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푸른 하늘 끝닿은 저기가 거긴가/아카시아 흰 꽃이 바람에 날리니/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꽃밭 가득 하얗게 피었습니다/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먼 하늘을 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어린이가 몇이나 있었겠는가? 어린이에게 이런 노래는 의미 없는 소리를 장착한 음률의 조합일 뿐이다. 음악 교과서 집필자들은 별생각 없이 이런 노래를 동요라고 교과서에 수록했고, 교육 현장에서도 그냥 가르쳤다. 이런 노래에서 동요의 반인 가사를 통한 정서 함양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의 전반에 걸쳐 있는 본질의 바깥에서 겉도는 관행과 관계가 있다.

글쓰기 교육에도 비슷한 예가 많다. 고 이오덕 선생은 시골 초등학교에서 제대로 된 글쓰기와 표현 습관을 가르치는 데 평생을 바친 분이다. 그의 책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에는 엉터리 글과 진짜 글의 예가 많이 나온다. 몇 가지만 옮겨보자.

중1 학생이 쓴 백일장 수상작이다. "… 내가 언제 몰래 가도 산은 늘 그곳에 머물러 준다/산이 푸름을 토할 때면 불볕도 푸름에 녹아 바람이 된다/…/산의 정취에 취해 수풀을 해치며 푸름을 먹으며 푸르름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가고 있다/내 마음은 청포도 알같이 부풀어만 간다/…/산의 메아리 속에 산의 생명력이 아련히 들린다." 기교 있고 잘 썼지만 읽고 나면 여운이 없다. 가슴으로 쓴 글이 아니라 머리로 쥐어짜낸 글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를 쓰던 어린이가 대학에 가면 이런 류의 수필을 쓰기도 한다. "… 너무도 잔인하게 나의 허물을 벗겨내는 칼날 같은 가을의 냄새 바로 그것이기에 인간이라는 무서운 조건하에서 진실로 삶 자체이고자 열망하는 숱한 사람들의 가슴속에 푸르뎅뎅한 아픔을 주는 가을." 가슴속에 푸르뎅뎅한 아픔을 주는 가을이 아니라 자기 소외로 인해 '푸르뎅뎅하게' 멍든 작자의 영혼이 보이는 듯하다.

바람직한 예도 있다. 초등학생의 시다. "학교에서 죽도록 공부하고 왔는데 오늘도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해야 한다/엄마는 부엌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우리 집 위의 동산에서 노는 아이들의 소리가 난다/살짝 문을 열면 엄마는 니 공부 안 하고 또 놀러 가제/매일매일 공부는 안 하고 노는 데만 정신 파노, 이놈 새끼/나는 또 책상에 쪼그리고 앉아 억지로 공부를 한다." 투박하지만 맑고 정직하다.

국어 교육은 글을 자연스럽게 읽는 것보다 글을 분석하는 데 치중해서는 안 된다. 김춘수 선생 시가 입시에 출제되었는데 작자인 자신이 풀어보니 40점밖에 못 받았다고 한다. 입시 문제가 이렇게 가면 교육이 비틀리지 않을 수 없다.

어디 이런 본질의 소외가 동요나 글쓰기뿐이겠는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의 소외가 존재한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큰 질문은 대단히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흔히 가장 기본적인 곳에서 나온다. 행렬 연산이 공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감지하지 못한 채 행렬을 취급한다. 어려운 수학식을 헤쳐 나가면서 정작 그것의 본질적 구조나 함의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관심이 없는 경우를 본다. 본질은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주제들 속에서 은유적 관계를 찾아내는 능력과도 관계가 있다. 은유적 능력은 고급 경쟁력의 핵심적 구성 요소다. 본질이 소외되는 만큼 경쟁력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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