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공자께서는 진짜 앎이 얼마나 무지한지 아는 데 있다고 하셨다. 비슷한 맥락에서 토머스 제퍼슨은 "하는 사람은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 안다."고 했다. "무지가 아니라 배우지 않으려는 것이 수치다."라는 멋진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도 있다.
소비에트 공산사회주의 공화국(구 소련)의 독재주의 지도자인 레닌도 학생들에게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는 구호를 티토트 학생들에게 하는 연설에서 훈시했다. 이와 대조적인 일들이 현대 사회의 지도자들에게서 너무나 태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무지를 장점으로 만든 최초의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정치 지도자라 할 만하다. 그를 뽑은 많은 사람들이 그가 뻔히 드러내는 무지나 그것에 대한 수치심 부족에 오히려 동질감을 느끼며 팬덤을 형성한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른 가식적 정치인이나 테크노크라트와 달리 그에게 진정성이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라고 충동하고 있다. 우리나라 진보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무지에 대해, 자신들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무지는 또 항상 부인과 함께 한다. 대기업 조직에서 이윤을 얻는 방식에서 이루어지는 부인의 사례들에서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것들이다. 부인의 움직이는 표적으로 매일 싸워야 할 질병 같은 조직 문화적인 현상으로 고착되고 있다.
이런 사람이나 조직들의 공통적인 문제가 우선 정말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현실이나 현장의 상황을 모르고, 지위가 낮은 중간 간부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지만 상급자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할 가능성이 있다.
또 위에서 아래까지 모든 사람들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지만, 끔찍한 진실에 눈을 감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모두 보았지만 보지 않았을 뿐이다. 알았지만 알지 않았다. 조직 보호를 위해 스스로 바보가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보호를 위해 바보가 된다.'는 말은 조지 오웰이 자신의 소설'1984년'에서 그것을 "범죄 중지 전략"으로 사용한 말이다. 그것을 어떤 위험한 생각이 들기 직전에 마치 본능에 의한 것처럼 갑자기 그 생각을 멈추는 능력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기성 권력에 불리할 경우 유추를 하지 못하고, 논리적 오류를 인식하지 못하고, 가장 간단한 주장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능력이 포함되며, 이단적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모든 생각의 사슬을 따분해 하고 역겨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바보짓들을 하거나 고의로 무지한 척한다. 우리나라에서 흥하고 있는 '내로남불' 언행이 대표적인 예다. 또 최근의 공수처의 무분별적인 애꿎은 국민 사찰이 대표적이다.
오늘도 흥겹고 행복한 금요일 하루 만들어 가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