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가 변하면 현재로 이끄는 과거의 선들도 변하고, 인연은 돌고 돈다
어떤 한 시대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를 패러다임(paradigm)이라 한다. 즉, 어느 주어진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서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으로, 현재의 조건들에 의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새로운 선이 제시된다.
또한 패러다임은 다른 한편으로 그런 집합에서 한 유형의 구성 요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모형이나 또는 예제로서 사용되어, 정상 과학의 나머지 퍼즐에 대한 풀이의 기초로서 명시적 규칙들을 대치할 수 있는 구체적 퍼즐 풀이를 나타낸다.
패러다임이란 표현은 아주 고대 희랍어 ‘파라데이그미(paradeiknumi)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여기서 접두사로 쓰이고 있는 para-는 '~과 함께 나란히' 혹은 '~과 비교해서'를 뜻하며, 이 'deiknumi'는 '보여 주다'나 '밝혀주다'라는 의미다.
합성어인 'paradeiknumi'는 ('~과 함께 나란히') '비교하다'를, 또는 ('~과 비교해서') '재현하다'를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 희랍어 명사인 'paradeigma'는 바로 여기서 말하는 '패러다임'의 어원으로, '패턴'(pattern), '모델'(modell), '예'(example) 등을 뜻한다.
이런 '파라데이그마'의 뜻을 보면, 원래 고대의 희랍에서 파라데이그마는 법률 용어인 판례의 의미로 사용되고, 예술 영역에서는 모델, 즉 예술가의 작업을 위해서 설정되는 표현 대상(오브제)를 뜻했으며, 그리고 일상적 토론에서 유용한 예증(例證)으로 쓰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요즘 우리가 쓰는 패러다임과는 조금 달라 보인다. 요즘 우리가 주변에서 잘 들을 수 있는 말로 "누구는 타(他)의 모범이 된다.", "무엇이 누구를(무엇을) 위한 좋은 본보기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때의 모범이나 본보기가 요즘 들어 흔히 쓰이는 패러다임에 맞을 바로 그런 표현이다.
학술적 의미로는 플라톤의 이데아론(또는 형상 이론)에서 잘 볼 수 있다. 플라톤 철학에서 말하는 이데아(idea)는 현실 세계에 있는 다른 사물들을 위한 파라데이그마, 즉 바로 본, 또는 본보기의 의미이다. 현실의 모든 것들은 이데아를 본떴거나, 이데아를 본보기삼아 이루어진 그런 것들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패러다임 삼아 현실 속에서 구체화된 것들이다. 여기서 플라톤의 이데아는 패러다임이 되며, 패러다임으로서의 이데아는 완전할 수 있으나, 이를 본뜬 것들은 당연히 불완전하다. 본뜬 것이 이데아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본뜬 것의 불완전성은 패러다임으로서의 이데아 때문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경험적 한계 때문이다. 이는 하나의 파라데이그마를 말할 수는 있겠으나, 그 나타나는 모습은 여러 가지일 수 있으며, 패러다임이라는 용어에도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이다.
요즘 쓰이는 패러다임이란 표현은 미국의 과학철학자 겸 과학사학자 토머스 쿤이 처음으로 과학 혁명을 논의하는 데에 사용했다. 즉 과학의 발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끌어들였다.
이 새로운 용어인 일반 명사로서의 패러다임을 정의 내리기가 정말 쉽지는 않다. 우리가 역사적 논의에서 찾아질 수 있는 여러 가지의 패러다임들을 감쌀 패러다임이 아닌, 어느 특정한 경우에만 해당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패러다임을 어느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그 무엇이라고 하는 이유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이란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집단에 의해 받아들여져 쓰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지금 우리 시대의 사건들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밝혀 주려는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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