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룩한 출발
동아국제마라톤이 열린 어제,
존경하는 이동윤 원장님의 부탁으로
예쁜 유진 양의 예비 신랑인 장봉근 군의
하프 페메를 했다.
페메란 초심자의 속도 및 부상 등을
잘 관찰하며 전 구간을 무리 없게
완주할 수 있도록 돕는 일...
나는 봉근이를 데리고 맨 뒤 E그룹 틈바구니에 간신히 끼어 출발을 기다렸다. 매번 느끼는 감정이지만 못 뛰는 사람들은 꼴찌에 쭈그려 출발하는 서러움이 있다. 어제도 예외 없이 꽃샘추위가 제법 심한 서울 한복판 꼴찌에서 오들거려야 했다. 8시 정각 이봉주 선수를 포함한 등록 선수들이 출발하고 그 다음 A그룹부터 출발하는데 E그룹이 출발하기 까지는 무려 30분이나 걸렸다. 나는 스트레칭을 잠시 멈추고 “이봐 봉근! 하프까지는 가야지?” 하고 물었다. 그러자 봉근이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는 듯 “상황 봐서 어쩌면 완주도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와! 마라톤대회 처음인데 진짜 열기가 대단하네요. 정말 없는 힘도 막 솟아납니다.” 하며 허리를 아래로 깊게 굽히며 스트레칭을 탱탱하게 따라 했다. 나는 봉근이의 자신 넘치는 행동이 은근히 겁이 났다. 페메를 해주는 내가 오히려 페메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소 불안했다. "이 사람아! 마라톤은 그렇게 하는 것 아니야. 힘이 남아돌더라도 곧 결혼 할 사람이 무리하면 안 돼. 오늘은 절대 무리하지 말고 그냥 처음 마음먹은 대로 하프까지만 가는 거야. 자네 장인어르신도 거기까지만 뛰게 하라고 나한테 특별히 당부 하셨어. 그러니까 오늘은 저 신설동 거기 하프가 끝이야. 알았지” 나는 발 빠른 압력으로 봉근이의 풀 기분을 확 꺾어 버렸다. 그리고는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머리 좋은 봉근이는 Y대 출신답게 내 뜻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은 가뿐했다. 둘은 나란히 타임매트를 밟고 광화문네거리를 달려 나갔다. 덩달아 형형색색의 유니폼들도 꼭두각시 인형처럼 팔랑팔랑 달려갔다.
2. 달려라 봉근아!
꽃샘추위가 찾아 온 일요일 서울 아침은 제법 추웠다. 불타버린 남대문 옆을 돌아 을지로 입구에 다다랐는데도 나는 손이 시렸다. 여느 3월 같았으면 지금쯤 땀도 좀 나련만 얼굴이며 종아리가 시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봉근이는 윗도리 지퍼를 약간 내리며 숨을 몰아시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아니, 풀을 뛸 수 있다던 친구가 왜 5키로도 못 와서 숨을 헐떡이나 싶어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러자 봉근이의 얼굴은 이미 땀이 송송 맺히기 시작했으며 콧구멍도 제법 성난 황소처럼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뿔싸! 이런 상태라면 잘 가야 10km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속도를 낮췄다. 괜한 페메 잘못해서 남의 귀한 사위 골병들게 했다는 소릴 안 들으려면 할 수 없었다. 걷는 속도로까지 다운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리를 추월해 갔다. 나는 좀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연습이 부족했다지만 이렇게까지 느리게 뛴다는 것은 옛 3시간45분의 자존심이 말도 아니게 상했다. 그렇다고 어쩔 수는 없었다. 남의 귀하디귀한 사위를 데리고 뛰는 데야 내 자존심 정도는 헌 고무신짝처럼 내동댕이칠 수밖에 없었다.
을지로를 돌아 청계천으로 튀어 나오는데 도심 복판에서 숨어 있던 찬바람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낡은 교각이 있던 자리에는 찬물이 흐르고 양 옆으로 줄지어 뛰는 철각들의 우렁찬 발소리는 마치 적진을 향해 뛰는 말발굽소리 같았다. 급기야 봉근이의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 졌다. 가슴을 앞으로 내 밀고 머리를 뒤로 젖히며 뛰는 모습이 전형적인 지친 자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걷기를 권유했다. 그러나 봉근이는 내 청을 뿌리치고 계속 달렸다. 아니, 조금 빠른 속도로 걷는 수준이었지만 본인에게는 그것이 생사를 넘나드는 최고의 속도요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으리라. "그래, 봉근아 달려라" 나는 속으로 이렇게 응원하며 힘차게 발 맞추어 뛰었다.
(사진은 마지막 편과 함께 싣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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