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실체적인 어떤 형태나 생각으로 예상되는 것은 어떤 것도 없다는 공의 개념은 허무와는 전혀 다르며, 절망을 부르짖는 것 또한 아니다. 오히려 무상하고 ‘공’인 것을 알기 때문에 삶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본다.
나와 다른 사람의 공생과 상생을 걱정할 수 있는 대승적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집착이란 집착을 모조리 벗어던짐으로써 진정한 의식의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게 됨으로써 참된 실천이 비롯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부정이 부정으로 끝나는 한 그것은 아무것도 낳을 수 없다, 거기에는 오로지 멈춤만 있을 뿐이며, 판단의 단절과 침묵이 있을 따름이다. 진실을 향해 접근할 뿐이어서 그것을 이것이라고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공은 단순한 부정이나 부정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긍정으로 진화하는 것이라는 점에 탁월한 대승적 사색과 실천의 자취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후일 인도에서 수학의 '0'이 발견되면서 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공의 사상이 없었다면 인도에서 '0'은 발견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과 0은 그 작용에서 사뭇 닮은 점이 있다. 0이 모든 수학적 작용의 근원이 되는 것처럼 공도 모든 실천의 근원이며, 항상 이를 지탱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부정의 논리가 아니라 바로 자비의 실천이 되는 셈이다. 마치 니체의 허무주의로 통하는 맹목적 긍정과 반항적 부정과 진정한 긍정, 예속과 자유의 반박과 진정한 인식적 이념으로써의 자유, 전통과 파괴와 진정한 새로운 창조로 발전한다.
허무주의 개념은 염세주의와 열반, 무와 비존재 등의 개념과 병행하여 등장하였으나 19세기 유럽 사회의 문화 현상에 대한 총체적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며, 니체의 후기 철학의 전개 과정에서 더 이상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다.
"어린 아이는 순진이며 망각 그것이다. 새로운 시작이며 유희며 스스로 굴러가는 수레바퀴며 최초의 운동이며, 성스러운 긍정이다. 창조의 유희에는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신은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자 원한다고 이야기한다.
외부의 세계를 잃어야 자신의 세계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 속에 공의 지유와 긍정과 실천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공이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서 진실을 낳게 해주는 것이니까 말이다.
즉 공은 지혜를 배우고 따라 익히고 닦아서 쉬는 일 없이 정진하는데 힘쓰는 동시에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그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실천하는 일이다. 그런 실천을 통해 공이라든지 아니라든지 하는 생각에 멀어지지 않는 것이 바른 실천법이다.
오늘도 흥겹고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만들어 가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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