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우리 의사들은 건강보험제도 자체를 부정합니까?
의사들이 건강보험제도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의료보험제도를 통해 더 나은 의료 및 사회안전망이 강화되고 확대되기를 희망하며 그렇게 되는 것을 누구보다 더 환영합니다.
의사들이 거부하는 것은 정부의 일방적이고 강제적이며 오만하고 협박적인 정책시행 방법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지난 6월 18일 대법원에서 서울성모병원의 임의비급여 항소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정부는 지금까지 응급상황에서 백혈병 등 중증 환자의 소중한 생명을 살리려고 최선을 다했던 의료진들의 노력이 마치 부당한 영리추구 행위인 것처럼 매도해왔습니다.
최선의 진료를 다할 의료인의 의무와 유효하고 적절한 진료를 받은 환자의 권리 등에 비춰볼 때 제한된 요건에서 의학적 필요성이 있는 경우까지 모두 부당행위로 볼 수는 없으며, 의학적 정당성이 있을 때는 임의비급여를 제한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이 소송은 정부가 의사들을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가는 중요한 모델이었습니다.
환자의 생명연장과 빠른 회복을 위한 의사들의 피나는 고뇌에 찬 결정이나 행위를 무시하고 의료현장의 상황과 맞지 않는 문자화된 관련법 규정에만 의거하여 의사들을 부도덕하고 부정한 집단으로 호도하여 국민들과 의사 사이의 관계를 떼어놓으려던 정부의 속임수가 들켰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공급자인 의료인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도 않고, 제대로된 표준화 검토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정절감만을 목표로 한 포괄수가제가 강제로 시행되면, 중증환자들을 치료해야 하는 외과나 내과계열의 의사들은 백혈병치료와 관련한 임의비급여 사태와는 비교되지 않는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입니다.
전국민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수가항목의 개발을 맡았던 모대학병원 외과 교수님께서 일에 치여있는 전공의에게 무책임하게 자신이 책임지고 수행해야할 보험수가 개발 업무를 맡긴 결과, 적절한 미래적 상황에 대한 고찰없이 참고용으로 동봉한 일본수가 규정을 그대로 베끼게 되고, 그것이 또 관료들의 검토단계에서 삭제 내지 삭감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1989년 7월 1일 전 국민의료보험이 시작되면서 외과는 전공의를 뽑지 못하는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외과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기피과 혹은 망한 전문과가 되었지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의사의 환자에 대한 전문적 처치 외에 의사로서의 자기 환자에 대한 진실된 배려나 노력이 무시되는 상황이 포괄수가제로 다시 전 의료계를 뒤덮는다면 지금까지 나타난 외과 퇴락의 전철이 이제는 외과 뿐만 아니라 전 의료분야에서 시작될 것이는 우려입니다.
그래서 포괄수가제의 시행 전에 적절한 수가체계의 표준화와 수가 현실화 방안이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높은 의료질을 바라는 국민정서상 OECD 평균수가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가로 희생하고 있는 의사들에게 재정절감만을 위한 포괄수가제를 강제로 실시한다는 것은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정책이라는 것입니다.
법이 없어서 사고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이 따라가지 못하니까 사고가 나는 것이지요. 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 법적 권력만 휘두르며 의사들을 위협하고 협박하는 이런 사태를 언제까지 감수하며 눈치를 보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전 국민의료보험은 영국, 덴마크 등 선진복지국가들에 이어 18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실시되었으며, 미국보다 21년이나 앞선 것이라는 행정적으로 자랑스런 국제적 기록이 있습니다.
미국의 의료서비스는 포괄수가제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2007년 시작된 경제 침체 이전부터 파탄이 났고, 의료기반시설이 붕괴하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대내외의 평가입니다. 미국만이 가장 위대하고 역동적이며 민주적이고 번창했으며 세계적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있으며, 기술적으로도 가장 우위에 있다는 자만과 오만심, 그리고 대책없는 낙관주의의 결과입니다.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습관이 성공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위험에 대처할 준비태세를 와해시켜 재앙을 예방하거나 막을 수 없게 합니다. 지나친 낙관적 단서에 도취되어 어느 누구도 발벗고 나서서 불편한 증거나 경고성 증후들에 주의를 기울이거나 상상력을 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의료계도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정부는 10년 전의 의약분업의 실패에서 배울 교훈을 무시하고, 또 다시 포괄수가제를 강제시행하려고 하고 있으며, 거의 당연시되었습니다. 의료는 자동차나 공산품처럼 기계적으로 자동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정량적 상품이 아닙니다.
그것을 정량적인 상품으로 만들겠다면, 환자와 의사의 관계는 사라지고 교과서나 인터넷에 있는 정량화 가능한 문자적인 치료만 있을 뿐입니다. 그 책임은 누가 질까요? 또 부도덕한 의사집단이 져야할까요? 그런 의료행위에 대한 책임도 의료현장이 아니라 법을 만든 관료들이 져야 균형있는 행정이 아닌가요?
나는 개인적인 실망이나 망한 외과계를 보는 심란한 기분으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공공의료보다 민간의료가 주축인 한국에서 의사들의 끝없는 희생과 고통이 의사들의 삶의 통찰력이나 미덕의 근원이 된다는 낭만적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나도 좋은 일자리와 의료서비스 같은 사회안전망이 더욱더 탄탄해져서 누구나 웃고 즐기며 행복을 더 많이 보고 경험하고 널리 전파하며 사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가 충족된다면 말이 필요 없겠지만, 이것은 영원한 국민들의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세상살이는 희망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상태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초래했거나 세상이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장애들과 싸우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번에 정부와의 극한적 대결보다 국회를 통한 우회적인 문제해결의 방법을 결정한 대한의사협회의 결정을 진정으로 지지합니다. 의약분업 때와 비슷한 극단적인 투쟁의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제는 무작정 반대가 아닌 최선의 결과를 향한 우리의 깨어있는 의식입니다.
"일단 시작하면 잘될 것"이라는 대중적 환상이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나와 후배들을 위한 깨어있는 의식과 행동이 우리가 진정 바라는 의사라는 전문가 집단으로써의 유토피아적 행복의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힘을 내어 포괄수가제를 우리의 것으로 만듭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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