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마주하게 되는 고통들은 피할 수 없는 때가 대부분이며, 어떤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을 그런 혼란 속에 그냥 단순하게 내맡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 있는 힘을 다해 다가온 고통과 싸워야 한다.
신체적 고통에 대해서는 위생과 적절한 음식 섭취, 의약품, 그리고 여러 과학적 발전 등으로, 가족이나 집단 모두의 목표인 정의와 평화로, 요즘의 폭염같은 자연의 반역적인 폭력에서 오는 고통에 대해서는 과학적 탐구와 기술과 노동으로 싸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고통과의 투쟁에 참가했다면, 우리 삶의 모든 계획 속에 들어가고 있다고 확신해도 된다. 우리가 이런 투쟁을 효과적으로 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부정의한 일을 없애야 한다.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뿌리를 완전히 뽑을 수는 없다. 고통은 우리 존재의 한 조건으로 남아 있으며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을 것이다. 고통을 우리 자신에게 이롭게 이용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아니면 고통이 다시 우리를 절망의 밤으로 이끌어 가도록 내버려두는 길 밖에 없다. 우리는 각종 고통의 부산물들을 부쩍 많이 사용하거나 심지어 유해한 공산품의 찌꺼기도 우리 가족들을 위해 이용되고 있다.
만일 신앙이 고통의 기원의 신비에 관한 빛을 던져준다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이용하는 비결에도 빛이 비추어질 것이다. 우리는 죄의 부산물인 고통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공헌하도록 신에게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통은 신의 뜻도 아니며, 신이 만든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만든 것일 뿐이다. 우리는 죄를 지음으로써 고통을 숙명적으로 동반하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신이 세상에 나타나 고통을 그 무의미함으로부터 구속하게 된 것이다.
우주 만물 가운데서 있는 우리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 그 자체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그렇지만 고통이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도 참을 수 없는 동반자가 되고 있다. 오직 신만이 이런 참을 수 없는 상황을 막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태도를 취하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는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야 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받는 사람이 우리 가족이나 자식들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 즐거움보다 우리 자신도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되면서 자식들이 절망 속에서 고통 받도록 내버려 둘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인간적 사랑과 신뢰를 회복하는 일만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오늘도 흥겹고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만들어 가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