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살아 있는 존재의 신체 내면에서 일어나는 개인적 존재의 정신 활동, 자기의식, 그리고 자유의지 등에 대응하는 시간적 공간적 사건들은 그것들의 복잡한 구조와 물리화학적으로 공인된 통계학적 설명을 고려하면 엄격한 철학적이지는 않아도 최소한 통계적 결정이다.
발생과정에서의 세포 원자적 불확정성은 감수분열이나 자연적 혹은 방사선 유발 돌연변이 같은 사건들의 순수한 우연성을 강화하는 것 외에는 생물학적으로 의미있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사실은 자유의지에 모순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삶의 과정에서의 직접적인 경험들 자체가 아무리 다양하고 이질적일지라도 그것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철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신체 활동을 지휘하고, 그것에 책임을 느끼고 인정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즉 한 번이라도 '나'를 느끼거나 발설한 적이 있는 모든 의식 있는 정신이 자연법칙에 따라 체내 원자들의 운동을 통제하는 당사자라는 것이다. 개인의 생각들을 제한하고 특수화하는 특정 문화권에서는 대담한 행위가 될 수 있다.
불교 이전에 아트만이 브라만이라는, 즉 개인적 자아가 모든 곳에 있고, 모든 것을 아는 영원한 자아와 같다는 깨달음 같은 인도의 사상에서는 불경스럽기는 커녕 가장 심오한 통찰의 핵심으라 여겨져오고 있다.
이런 문화권에서는 말하는 법을 배운 이후에는 오로지 모든 생각 중에서 가장 거대한 이 생각을 자신의 정신으로 소화하기 위해 매진한다. 뿐만 아니라 여러 시대의 신비주의자들도 '내가 신'이라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특별한 경험을 말한다.
사랑 속에서 서로의 눈을 보며 두 사람의 생각과 기쁨이 유사하거나 같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하나라는 것을 깨달은 참된 연인들이 있지만, 대개 감성적으로 너무 바빠 명석한 사고에 몰입하지 못하는 연인들도 그 점에서 신비주의자에 가깝다.
이런 점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이념에서는 낯선 사상으로 남아있다. 우리 의식은 결코 복수로 경험될 수 없으며 단수로만 경험될 뿐이다. 의식분열 또는 다중인격 같은 병적인 경우에도 두 인격은 절대로 동시에 나타나지 않고 교대로 나타난다.
꿈 속에도 우리가 여러 인물들을 동시에 연기하지만, 무차별적이 아니라 그 인물들 중의 한 명일 뿐이다. 한 인물로 말하고 행동하고, 다른 인물의 대답이나 행동을 애타게 기다린다. 그럴 때는 그 다른 인물의 행동과 말을 조종하는 것이 우리 자신임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경험과 기억 전체가 한 단위를 형성하며, 그 단위가 다른 어떤 사람의 단위와도 다르다는 명백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런 단위를 '나'라고 부른다. 그것은 일종의 그림의 밑바탕이 되는 백지에 불과할 뿐이다.
생각이라는 그림을 모아두기 위한 바탕일 뿐이다. 고향을 떠나 오래 살다보면 고향의 친구들을 잊어버릴 수도 있고, 새로운 곳에서 새 친구들과 사귀고, 긴밀히 교류하며 삶을 공유할 수 있다. 새 삶을 사는 동안 '나였던 고향 사람'을 3인칭으로 인지하고 부를 수도 있다.
옛 친구들보다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이 더 가슴에 가깝게 와닿고, 더 강렬하게 살아있고 더 익숙할 것이다. 옛 삶과 새 삶 속에 죽음이라는 단절이 있은 것은 아니며,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 존재의 상실이라는 가슴 아픈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렇다.
오늘도 흥겹고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만들어 가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