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과 손가락이 비어 있어야 무언가를 잡을 수 있듯이, 어떤 공간은 그 존재 자체로 다른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만든다. 명상에서 선택하는 침묵 억시 아무런 존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텅 빈 어떤 공간 속의 대상으로부터 눈을 돌려 공간 자체를 바라보면, 즉 이 방의 본질은 물론 비어있는 공간이다. 가구나 그림 등 방안에 있는 물건들이 아니며, 방과 경계를 이루는 마루나 벽과 천장도 본질이 아니다. 공간 없이는 방도 없다.
공간은 없을 '무(無)'이므로 거기 있지 않는 것이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신에 공간을 인식은 하되 거기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면에서 의식의 이동이 일어나 가구나 벽 등과 같은 공간 속에 있는 대상들과 상응하는 마음의 대상들, 즉 생각이나 감정, 감각의 대상들이 있게 되고, 결국 공간과 상응하는 것이 의식임을 깨닫게 된다.
공간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듯, 의식은 마음의 모든 대상들을 존재하게 해준다. 따라서 공간 속의 대상인 사물로부터 주의를 거두면, 자동적으로 내 마음의 대상들로부터도 주의를 거두게 된다. 즉 무언가 생각을 내면서 공간이나 침묵을 인식할 수는 없다.
내 주변의 빈 공간을 인식함으로써 동시에 무심의 공간을, 순수 의식을,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인식하게 된다. 공간에 대한 주의가 하나의 문이 될 수 있다. 공간과 침묵은 원래 동일한 유(有)와 무(無)의 두 가지 측면이다.
내면의 공간과 내면의 침묵이 외부로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고요함이고,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무한히 창조적인 자궁 같은 것이지만, 이런 차원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 대부분은 내면의 공간도 고요함도 없이 늘 균형을 잃은 상태로 있다.
실제로 세상을 알거나 최소한 세상을 알고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을 뿐이다.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형상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여긴다. 본질에 대해서는 전혀 캄캄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형상을 지닌 모든 것은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잘못 인식하고 왜곡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우주적 천재지변이 일어나 이 세상에 종말이 온다고 해도 현시되지 않는 세계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것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참된 것은 그 무엇도 위협받을 수 없다. 참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형상있는 모든 것은 소멸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세상을 이기게"된다는 예수님 말씀이나 "피안으로 건너가게"된다는 부처님 말씀이나 일맥상통하다.
오늘도 흥겹고 행복한 하루 만들어 가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
다음글 : 
이전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