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료실 책상 위에 조그만 조약돌을 두 세 개 두고 있다. 시간이 무료하거나 생각이 깊어질 때 한 번씩 손 안에 가만히 꼭 쥐고 감촉을 즐기거나, 또는 책을 읽을 때 책장이 제대로 날리고 않도록 얹어두기도 한다.
회색에 검은 줄이 약하게 있으며 쥐면 매끄럽고 단단하며 부피와 무게감이 약간 느껴지기도 하는 그 돌을 손에 가만히 쥐고 있으면 내 손에 큰 만족감을 주고, 그 자체로 사랑하게 만든다. 만약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면 그 멋진 돌이 그럴 것이다.
어떤 것이 상호 작용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그 돌은 정말 자립적이고 완전하게 존재하게 위해서 창문턱이나 부엌 싱크대, 그 밖의 어떤 곳도 필요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내가 죽고 난 훨씬 후에도 그 돌은 존재할 것이다.
나는 내 손 안에 편안하고 단단하게 놓여 있는 그 돌을 복잡하게 분석하거나 찾거나 바라보기 위해 별도의 부담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다. 이런 조건 자체만으로도 이 돌은 이미 독립적으로,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비어있다'는 '공(空)'이 부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만약 본래적이고, 독립적인 존재를 너무 넓게 한정하면 허무주의가 된다. 그러면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와 달리, 존재의 한계를 너무 좁게 한정하면 실재론으로 귀착된다. 그러면 사람과 대상들은 실체적인, 불변의 본성을 가지게 된다. 그런 본성이 '무상(無相)'이라고 해서 불교 교리와 일상적 경험에서 강력하게 부정되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이 두 극단을 혼합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피하고 부정해야 한다. 생노병사의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이 깨달음이며, 그것을 이룬 분이 부처님이라는 고귀한 상태는 모든 모순과 대립을 초월하라는 의미다.
윤회와 열반은 다르지 않다. 공의 완전한 동화는 우리를 무명(無明)에 뒤덮인 자기 중심적 개인에서 지혜와 자비의 화신인 완전한 깨달음의 존재인 부처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독립적 존재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의미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기둥이나 돌이나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원인과 조건들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독립적이거나 독립적이거나 본래적인 존재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엄청난 철학적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다.
기둥은 우리가 지은 집이라는 인공 구조물 위에 서 있을 뿐이다. 진공 속에 혼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기둥이 서 있기 이전의 톱으로 잘려지고, 다듬어지고, 보존재가 주입되고, 벼락을 피하도록 피뢰침이 설치된 콘크리트 구조물 속에서 서 있다.
즉 기둥이라는 기능물로 변하기 전의 원인과 조건, 환경에 깊이 연관되어 있고, 의존하고 있다. 또한 그것을 멋지게 바라보는 시각과 촉각, 근육조직, 눈과 사지의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상호작용 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전체의 한 부분일 뿐.
오직 나에 의해서만 기둥이란 존재의 개념적 명칭 속에서 그것의 기능을 구성하는 것에 의존하여 존재할 뿐이다. 마음의 정상적인 기능 또한 이와 똑같다. 다양한 기능적 지각의 파편들과 기억과 연상, 그리고 예상들이 모여 하나의 개념으로 존재한다.
오늘도 흥겹고 건강한 하루 만들어 가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