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고(是故)는 '그러므로'라는 의미의 접두사이다. 이 두 글자가 앞글과 뒷글의 연결시키면서 이하 해석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앞문장은 "공(空)한 실상은 생멸이 없고, 오염되고 청정함도 없으며, 증감도 없다"는 내용이다.
물론 중생의 미망 속에서는 사물의 생멸과 오정, 증감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지만, 최고의 진리인 공함의 진실한 모습에서는 그런 차별상이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미망과 깨달음의 차이를 꿈과 생시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면, 물에 비친 달의 비유가 있다. 종경(宗鏡)스님 시에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이란 구절이 있다. "천 개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비친다"는 의미다. 여기서 달은 '진리의 본체', 대원각성(大圓覺性), 본각(本覺), 일진여심(一眞如心) 등으로 불린다.
혹은 '진여불성(眞如佛性)' 혹은 '공성(空性: 空의 원리, 즉 최고의 진리-眞諦)'을 비유하고, 무수한 강물에 비친 달은 그러한 진리의 본체가 현상계를 전개시키고, 현상계를 품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물에 달이 비쳤다고 달이 생겨난 것도 아니고, 달이 안 보인다고 사라진 것도 아니다.
달의 비침으로 인해 물이 깨끗해지거나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며,(거울에 오물이 비친다고 해서 거울이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듯이), 물그릇에 달이 비친다고 해서 달이 더 늘어난 것도 아니고, 물을 버린다고 달이 준 것도 아니다.
현상계가 어떻게 변하든 그 현상계의 근원인 본체(空性)는 늘 그대로이다. 실제로 모든 현상은 우리 마음(즉 진여심眞如心)에서 연기(緣起)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일시에 세상을 만들어 내고 부수는 것과 같고, 눈병 난 사람이 허공에 무수한 헛꽃을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空한 실상을 보는 것은 꿈을 깨는 것과 같으며, 눈병을 치료하는 것과 같다. 꿈을 깨고 눈병을 치료하면 그만이지, 꿈을 깨고 눈병이 나은 후에 보는 실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공중(空中) 즉 공(空)의 관점에서는 '중(中)'자 하나를 번역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空 속에서는"? "空한 자리에서는"? "空을 직관할 때는"? 그냥 "空의 관점에서는"으로 낙착을 봤지만 좀 불만스럽다. 뜻은 "空을 깨치고 보면" 쯤 되겠다.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없다(무, 無)'는 "차별상으로 없다"는 뜻이다.
"꿈속의 사물이 생시에 없듯이 없다"는 뜻이며, "눈병 난 사람의 눈에 비친 허상이나 신기루가 실제로 없듯이 없다."는 뜻이다. 유식(唯識)사상에서는 인간계 중생이 물(水)이라고 보는 것을 색계(色界) 중생은 보석으로 보고, 아귀는 피고름덩어리로 본다고 한다.
과연 어떤 것이 제대로 보는 것인가? 제각기 업을 따라 업식에 비치는 대로 볼 뿐이다. 이것은 '물'이라 할 것도 없고, '이것은 보석'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래서 여기서 없다(無)고 한 것은 "어떤 것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다.
후각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모든 음식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한다. 내가 달다고 느끼는 치즈케잌에서 그 사람은 비린내를 느낀다. 과연 어느 맛이 옳은가? 사실 단맛도 본래 없고 비린맛도 본래 없다. 진화 조건과 질병이라는 조건에 따라 달거나 비린 맛으로 느껴질 뿐이다.
'오온(五蘊)이 없다(無)'는 말은 空하면서 空한 채 또 五蘊이라는 말이다, 즉 空은 현상을 잃고 치우쳐 있지도(偏空) 않고, 현상과 단절되어 있는 것(斷空)도 아니다. 五蘊이 空하다는 말 속에는 中道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中道가 바로 서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어째서 오온을 다시 "죽이는가"? 오온이 공하다는 것과 오온이 없다는 건 엄연히 다르다. 자칫 편공(偏空)과 단공(斷空, 혹은 但空)으로 치닫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든다. "空을 꿰뚫어 볼 때(空中)는 五蘊이 없다(無)"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으로서의 五蘊에 대한 중생의 집착을 부수는데 주안점을 둔 것이다. 모든 사물은 空한 동시에 有(현상, 존재자)이고 有인 동시에 空하다. 그러나 중생들이 차마 떠날 수 없는 것이 현상이 참답게, 그 자체의 정체성을 가지고, 독립자존적인 실체로 존재한다는 분별과 집착이다.
"五蘊이 없다!"는 폭탄선언은 오로지 중생의 미망을 깨뜨리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른바 파사즉현정(破邪卽顯正)이다. 그릇된 것(邪)을 부수는 것(破) 자체가 바른 것(正)을 드러내는(顯) 것이므로 달리 바른 것을 세울 필요가 없다.
五蘊이 참된 有라는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는 것(破邪)이 바로(卽) 空이라는 바른 중도의 이치, 즉 中道實相을 드러내는(顯正) 것이다. 십이처는 감각기능인 육근(六根: 눈, 귀, 코, 혀, 몸, 생각)과 그 대상인 육경(六境: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관념)을 가리킨다.
붓다는 "세상의 존재하는 모든 것, 즉 一切는 십이처"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의 경험은 이 열 두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십팔계는 육근과 육경이 부딪힐 때 그것을 알아보는 '여섯 가지 의식(六識)'을 모두 합한 것이다.
즉 六根+六境+六識=十八界이다. 육경과 육근과 육식이 같이 나타날 때 비로소 인식이 성립하고 이것을 만남, 전문용어로 촉(觸)이라고 한다. 눈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눈의 의식(眼識)이 그것을 지향해야 그것이 "보인다".
옛말에 "마음이 없으면 봐도 안보인다.(心不在焉 視而不見)"는 것도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십이처와 십팔계가 모두 없다(無)는 건 한마디로 인식하는 것도, 인식되는 것도 없다는 말이고, 싸잡아서 일체의 우리 경험이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내가 지금 사과를 보고 있는데 보는 눈도 없고, 보이는 사과도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五蘊이 없다"는 이치와 같다. "눈이건 사과건 참된 有가 아니다"는 의미다. 왜 그것을 되풀이, 또 되풀이하는가? 중생이 모든 현상을 참된 有로 보는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된 有로 보기 때문에 집착을 일으켜서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속박되기 때문이다.
|
다음글 : 
이전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