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나 위인들이 선 이해, 후 행동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진정한 신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스스로를 진정으로 스스로 믿으며 함께 나아가는 도반이며, 자녀들에게도 믿음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보여주며, 또 교육도 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앙이 많은 도움이 될 때는 삶이 위기에 처했을 때이다. 나는 물론 불교 신도로서 양심을 지키고 살아가며, 기도도 하고, 행사에도 참여하며, 종교적 기념일이나 전문적 행사에도 스스로 참여하게 된다. 스스로 신앙을 잃었거나 열정이 식은 사람도 있다.
살아갈수록 신심이 젊었을 때보다 견고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도 있고, 오히려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할 때도 있으며, 아무런 느낌도 느끼지 못하고 말라버렸다며 회의감을 느끼며 살아갈 때도 있다. 믿음의 참된 의미를 모르거나 오류에 잡혔기 때문이다.
믿음은 막연한 인상도 아니며, 고답적인 기분도 아니고, 인생 문제에 대한 천진스러운 낙관주의도 아니고, 삶의 안정이나 안전감을 만족시켜주지도 않으며, 하나의 진리나 의견도 아니며, 윤리규범도 아니다.
종교는 추리 과정의 불가피한 결론도 아니며, 과학적 증명도 아니고, 교육을 통해 주입된 사회적 습관도 아니다. 신앙이나 믿음은 그냥 우리 삶에 다가온 행운의 선물 같은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그 분들의 가르침의 진리에 동의할 수 있게 해주고, 가르침과 생애가 진실이라는 확신을 주며, 믿음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시각, 즉 조망권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가족과 물질, 역사의 흐름과 우주에 대한 조망이다.
믿음은 이런 관점과 조망에 의해 새롭게 형성된 세상에 우리 스스로를 투자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진리를 교리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새로운 지위와 격식에 대한 헌신과 봉사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이성은 우리를 믿음의 길로 초대해 줄 수는 있지만, 종교적 믿음 자체를 줄 수는 없다. 나는 내가 믿는 바를 삶에서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이 그 자체로 부처님이나 하느님과 같은 도리에 도달할 수는 없다.
상상력과 정서는 믿음으로 이끌거나 일단 접어들어 신심을 깊게 하는 데 이성보다도 더 힘이 약하다. 아무런 느낌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해서 놀랄 필요도 없다. 오히려 오로지 인간적 이성이나 감정을 끊어버릴 때라야 진정한 믿음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우리가 성인들이나 위인들로 인정하는 분들처럼 세상 만물과 삶의 문제들을 이해하고 행동한다면 그냥 단순히 인간적이기만 한 것이라 하더라도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이유다.
오늘도 흥겹고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만들어 가시길 빕니다. 이동윤 드림 |